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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느끼는 사진여행
직접 경험한 5.18 민중항쟁, 이렇게 시작되었다 본문
1980년 5월 17일 광주는 태풍전야의 숨죽인 정적이었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24시, 1980년 5월 18일 0시, 광주엔 학살의 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함께 이곳 ‘광주의 봄’은 햇빛 밝은 봄날 그대로였다.
대학가에서는 비상계엄에서도 유신독재의 망령을 벗겨내는 학원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고 시민들은 새로운 내일을 꿈꾸며 일상에 부지런했다.
도청 앞 분수대는 청년학생과 시민들이 어우러진 토론 한마당이 연일 민주주의 꽃을 피웠고, 저마다 세상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미래의 설계를 꿈처럼 그려냈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동자 농민 상인 지식인 종교인 청년 학생 아줌마 아저씨... 그냥 그저 그런 사람들이 날마다 모인 도청앞 분수대 토론장에서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부마항쟁과 10.26 그리고 12.12반란 이후, 이른바 ‘시계 제로’라고 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없는 비상계엄시국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우리 스스로 결정했다.
△ 옛 광주도청 풍경. 그곳은 민주주의의 광장이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 일정을 밝혀라’
아, 말로만 듣던 직접민주주의가 현실에서 살아 일어난 것이다. 드디어 민중의 함성 울리며 우리 역사의 큰 강줄기가 길을 열게 된 5월16일, 민족민주 햇불대성회는 도청 앞 분수대에서 이렇게 시작했다.
518민중항쟁의 새벽기관차로 일컬어지는 박관현 열사는 그의 마지막 출정 연설에서,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 이올시다. 우리가민족민주화 횃불성회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요,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모두어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주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라남도 도민, 아니 우리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온 누리에 이 횃불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 박관현 열사 기념비문 >
시민 도민이 한 데 어울려 오후 6시에 분수대에서 시작한 대성회는 횃불행진으로 이어져 다시 분수대로 돌아와 끝맺을 때까지 가로수 잎 하나 떨어지지 않았고 유리창은커녕 돌멩이 하나 날지 않았다. 우리의 요구와 주장은 “비상계엄 해제하고 민주화 일정 밝히라”에 이어 “오늘 성회 이후 조용히 기다리겠다. 정부당국은 성의 있는 답을 하라”였다.
그런 평화집회 평화행진을 어디서 보았는가, 어디서 들어나 보았는가.
그런데 1980년 5월 17일 밤 24시, 1980년 5월 18일 새벽 0시,
대한민국 공수특전부대 2개 여단이 민주의 도시, 평화의 도시, 인권의 도시에 그 칠흑의 야음을 타고 뱀처럼 기어들어왔다.
그리고 “학살”은 시작되었다.